Category: Blog

소나무 향 퍼지고

한 여자가 그네처럼 생긴 의자에 앉는다. 여자는 어디서 운동을 하다 왔는지 목이 땀으로 얼룩져 있다. 의자는 성인 남자 세 명이 앉을 수 있을 정도로 크다. 여자는 하품하면서 기지개를 켜더니 의자 위로 다리를 올려 자신의 품으로 끌어당긴다. 여자가 있는 곳에서 멀지 않은 거리에 공원이 있다. 주변이 소나무로 둘러싸여 있어서 소나무공원이라 불리는 그곳은 공설운동장이 폐쇄되고 몇 년 동안 버려져 있다가 한 정치인이 지나가면서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여기 공원을 만들어야겠는데요, 했던 게 공약이 되고 그 정치인이 과반이 넘는 표를 얻으면서 현실이 된 곳이다. 구름 한 점 없는 날, 바람이라도 불면 좋겠네. 여자가 노래를 부른다. 봄인가 여름인가, 소나무 향 퍼지고 나는, 부끄러워는 말게나. 아하, 눈에 힘주고 시원함만 즐기게나.

한 남자가 공원 주변을 걷고 있다. 남자는 반소매 티를 입었는데 날이 더운 탓인지 가슴과 등 주변이 땀으로 얼룩져 있다. 남자가 걷는 길을 따라 양옆으로 늘어선 소나무들이 남자를 굽어본다. 남자는 주변을 둘러보다가 한 소나무에서 그늘을 발견하고 가까이 다가가 앉는다. 이 소나무는 바람을 기다리다가 지쳐서 가지를 늘어뜨리고 있다. 바람이 불면, 소나무는 노래를 시작한다. 소나무의 노래는 한 가지에서 다른 가지로, 나무에서 나무로 이어져 바람을 타고 공원을 넘어 사람들이 사는 마을로, 도시로 퍼진다. 남자는 그늘에 드러누워 길게 늘어진 가지들을 본다. 소나무는 눈을 감고 숨을 내쉰다. 바람이 불어와 남자의 머리카락을 흔든다. 구름 한 점 없는 날, 바람 불어 좋겠네. 봄인가 여름인가 솔향 퍼지고 나는, 부끄러워 않겠네. 아하, 시원함만 즐기고 가겠네. 소나무가 노래를 부른다. 소나무의 노래는 남자에게서 시작되어 가지에서 나무로, 나무에서 바람으로 이어져 한 그네에 앉은 여자의 입김에 닿는다.

사거리의 기적

처음 보는 사람 둘이 거리에서 시비가 붙었다. 길을 건너다가 서로를 발견하지 못하고 부딪힌 탓이었다. 한 사람은 앞을 보지 못했고 다른 사람은 마주 오는 사람을 피하려다가 넘어졌다고 했다. 사람들이 모여들면서 거리는 금세 소란스러워졌다. 앞을 못 봤다는 사람은 주위를 둘러보며 목소리를 높였고 사람들은 그를 나무라면서 웅성거렸다. 신호가 몇 차례 지나고 나서 넘어져 있던 사람이 일어났다. 그리고 뭔가를 찾는 듯 두리번거리다가 사람들을 향해 엉거주춤 다가갔다. 사람들이 조금씩 물러나자 그는 아예 길을 트라며 팔을 휘둘렀다. 누군가 비켜주세요! 하고 소리를 질렀지만, 소란스러운 탓에 아무도 그 말을 듣지 못했다. 앞을 못 봤다는 사람은 계속 주위를 둘러보며 역정을 냈는데 이제 조금 전 부딪힌 사람에 대해서는 잊은 듯했다. 이때 넘어져 있던 사람이 달리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급히 양쪽으로 갈라서면서 길이 생겼고, 뒤쪽 어딘가에서는 비명이 들렸다. 역정을 내던 사람은 말하기를 멈추고 달려가는 사람을 쳐다봤다. 사람들은 잠시 웅성거리다가 빠르게 흩어졌다. 그리고 경찰이 다가왔다. 갓 스무 살을 넘긴 듯한데 의경 복무는 아닌 것 같았다. 신호가 바뀌고 차들이 굉음을 내며 지나가자 누군가 이제 가야겠다며 바닥에 뒹굴던 병을 세게 걷어찼다. 흩어지던 사람들은 다시 빠르게 모여들어 그를 나무랐고, 경찰은 사람들 틈에 묻혀 사라졌다.

우리 더 좋아질 거야

기억에 남는 건 마지막뿐이라서 말투, 표정, 손짓, 그런 것에 집중하려고 했다. 언젠가 돌아볼 수 있으려면 뭐든 남겨 두어야 했으니까. 그래서 가끔 자신에게 물었던 것 같다. 이제 그만둘까, 하고. 내가 다른 길을 보는 데 너무 능숙했던 탓에 너는 종종 수없이 많은 사람으로 쪼개어지고 사라졌다. 내가 너를 찾아 다시 모아두면 너는 내 눈을 보다가 나 아직 여기 있어, 우리 더 좋아질 거야, 라고 했고 나는 그런 너를 보는 게 미안해서 머리를 숙이고 손을 잡곤 했다. 그때 아무 말도 하지 못한 건 내 생각과 다르게 전달될까 두려워서였는데, 너는 그저 내 등을 두드리면서 웃을 뿐이었다. 그러다가 마음이 편해지면 우리는 짧은 여행을 떠났다. 산으로 바다로, 가보지 못한 곳을 함께 파헤치는 기분이 좋았다. 하지만 며칠 지나지 않아서 나는 다시 다른 길을 찾았고, 너는 그런 나를 보면서 이전보다 더 많은 사람으로 쪼개어지고 사라졌다. 그러면 나는 너를 찾아다녔다. 이런 일은 매주 거르지 않고 일어나서 가끔은 종교의식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흘러가는 것들

느리게, 더 느리게. 보이는 것 너머의 것을 보아라. 진실이라 부르는 것을 미워하고 세상을 의심하라. 네 숨을 따라 쉬는 자가 있을 것이니 그들을 믿고 허락하여라. 일어나야 할 일은 일어날 것이고, 일어나지 말아야 할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느리게, 더 느리게. 시계를 버리고 달력을 두어라. 그리고 새벽까지 깨어 있으라. 기다리는 자가 승리하는 법이니 견디어라. 새벽까지 해가 지지 않는 날, 네 옆에 내가 있을 것이다. 흘러가는 것은 제 갈 길을 모르지만 남은 시간이 너를 안내할 것이다. 나는 여기에 숨을 남겨 둔다.

나는 보이는 것 너머의 것을 본 적이 없다. 진실이라 부르는 것은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고, 내 숨을 따라 쉬는 자는 어디에도 없었다. 많은 일이 생기고 사라졌다. 제 갈 길을 모르는 건 나뿐이었으며 남아야 할 것은 빠르게 사라졌다. 인내하는 법을 배웠으나 쓸 곳이 없었다. 나는 아무것도 잡지 못했다. 느리게, 더 느리게. 많은 일이 생겨났지만 어디에서도 내가 바라던 일은 찾을 수 없었다. 어느 새벽, 어깨너머로 숨이 닿더니 천지가 진동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미움이 생겨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