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리를 닮았다는 말을 들었다. 옆 테이블에 있던 사람이 지나가면서 한 이야기다. 바지 아래에서 복숭아뼈가 웃는다. 얼굴이 부었나 싶어 거울을 본다. 분이 잘 펴지지 않았거나 술이 덜 깼거나 둘 중 하나다. 누굴 만나기로 한 것 같은데 기억이 희미하다. 가방을 뒤져 비타민을 찾는다. 잔을 채워야지, 생각하는데 누군가 와서 물을 따라준다. 체리? 하고 묻자 웨이터가 웃는다. 비타민을 물에 타지 않고 먹으면 폭발할 수 있어요. 입 안이 난리가 나거든요. 웨이터가 멀어진다. 혼자 시간을 보내기엔 호텔 로비도 좋구나. 컵에 비타민을 풀었다. 거품이 생겼다가 빠르게 가라앉는다. 마시고 나면 괜찮겠지, 싶어 고개를 젖히는데 목에 줄기 같은 게 걸린다. 손을 넣어보고 싶지만 입을 움직일 수가 없다. 얼굴이 빨갛게 오른 것 같다. 거울을 찾아야 한다. 옆 테이블에 사람이 앉았는지 희미하게 형체가 보인다. 누군가 내 앞에 접시를 두고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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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에 피는 꽃
타일에 생채기가 났다. 바닥을 두드리다가 생긴 일이다. 꽃잎 하나가 멍이 든 것처럼 벗겨졌다. 막대기 끝이 뾰족해서 언젠가 다칠 줄 알았다. 타일을 손으로 쓸어내린다. 벗겨진 살 위로 가루가 묻어 나온다. 밤에 피는 꽃은 생명이 질겨서 쉽게 죽지 않는단다. 멍이 든 상처에 볼을 댄다. 벌레가 나타나 눈앞을 빠르게 가로지른다. 타일은 범인을 알고 있다. 굳은 물감을 물에 풀고 부서진 가루를 넣는다. 어제를 기억하지 말고 내일을 창조하라. 때때로 오늘을 묻을 줄 알아야 앞으로 나갈 수 있다. 손가락에 물감을 묻혀 잎을 그린다. 섬세하지 않으면 장인이 될 수 없다. 초상화를 그리기 시작했다. 벌레가 다시 나타나 타일 주위를 맴돈다. 벗겨진 살 위로 생명이 돋아난다.
연필과 속도
연필이 부러졌다. 언젠가 쓸 일이 있겠지 싶어 사두었는데 막상 감성이 필요한 순간 부러지고 만다. 몇 문장 쓰지도 않았는데, 처음부터 불량이었거나 연필도 나이가 들어서 약해졌는가 보다. 오랫동안 꽂아만 둔 게 미안하면서도 왠지 서운하다. 종이에 남은 가루가 눈물로 보인다. 지우개를 가져다가 앞서 쓴 문장을 지웠다. 연필은 쓸 수 있을 때 의미 있는 것이니까 내게는 처음부터 없었던 것으로 하자.
속도는 움직이는 물체의 위치가 변하는 정도를 나타내는 물리량으로, 어떤 물체의 위치 변화를 시간 간격으로 나눈 값이다. 여러 번 읽어 봐도 어렵다. 문장을 통으로 외우면 좋을 텐데 내 머리는 바빠서 그럴 틈이 없다. 그래서 여기에 적어 둔다. 시간은 제멋대로 흐르고 하루는 시간을 넘어 내일로 간다. 나는 누구보다 빠르게, 낼 수 있는 최대의 속력으로 달린다. 여기에다가 속력 대신 ‘속도’를 쓰려면 문장을 어떻게 바꿔야 할지 생각하고 있다.
비가 오는데
창문이 고장 났다. 바람이 세게 부는데 창을 닫을 수 없어서 비가 들이친다. 책상이 젖기 시작했다. 커피를 마시고 둔 컵에 어느새 물이 차 있다. 책을 안쪽으로 옮겨야 한다. 책장을 사야 하는데, 생각만 몇 달을 했더니 결국 고생이다. 게으름 때문이다. 창문이 잘 닫히지 않는다는 걸 알았을 때 날이 좋았기 때문이며 이제 태풍이 다 지나갔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뉴스에서도 그렇게 말했다. 한동안 비가 오지 않을 테니 미뤄둔 나들이 지금 하시라고. 모르는 사람이 하는 말은 믿는 게 아니란다. 그래도 책장은 필요할 때 바로 샀어야 하고 창문이 닫히지 않으면 고쳤어야 한다. 그랬으면 지금 빗소리를 들으며 책을 옮기는 게 아니라 읽고 있었을 테니까. 생각해보니 억울해서 책 옮기기를 그만둬야겠다. 연주하고 싶은 곡이 생각났다. 주전자에 물을 올리고 피아노 뚜껑을 연다. 반쯤 열린 창문으로 빗소리가 들어온다. 책은 비닐을 찾으면 대강 덮어 둬야겠다. 아무래도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