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춤추는 손잡이

이번 정류장은 갈월동입니다. 버스에 남자 둘이 탄다. 한 명은 나이가 지긋해 보이고 다른 한 명은 고등학생쯤 된 것 같다. 둘은 서로를 모르는 체한다. 빈자리가 많은 덕분에 한 명은 금세 자리에 앉았지만 다른 한 명은 우물쭈물한다. 빈자리가 많은 탓에, 어디에 앉을지 고민하는 사이 버스가 출발하고, 이어서 차선을 바꾸는 바람에 천장에 달린 손잡이들이 춤을 춘다. 고등학생쯤 되어 보이는 남자가 휘청거리다가 손잡이를 겨우 잡는다. 그리고 천천히 걸어와서는 내 옆에 앉는다. ‘빈자리도 많은데 왜 여기 앉아요?’라고 나는 속으로 물었다. 창밖으로 소나무가 빠르게 지나간다.

이번 정류장은 서울역입니다. 이번엔 여자 둘이 버스에 탄다. 20대 중반쯤 되어 보이는데 서로 친구이거나 꽤 가까운 사이 같다. 한 명은 머리가 어깨를 덮었고 다른 한 명은 머리를 질끈 묶어 목덜미를 내놓았다. 둘 다 20대 중반쯤 되었나 싶다. 내 옆에 앉은 남자가 두 여자를 관찰한다. 버스가 출발하면서 천장의 손잡이들도 다시 춤을 춘다. 이번에는 차선을 바꾸지 않았지만, 기사가 악셀을 세게 밟은 탓인지 버스가 앞뒤로 출렁인다. 서울역을 지나 남대문으로 곱게 진입하는 것을 보니 오늘은 시위가 없거나 이미 지나간 모양이다.

이번 정류장은 남대문 시장입니다. 버스가 멈추지 않고 역을 지나쳐 간다. 내리는 사람도, 타는 사람도 없다. 거리가 한산하다. 빨강, 노랑, 초록, 파랑, 손잡이는 색색 옷을 입고 창밖을 본다. 버스가 차선을 바꾸면서 내 몸도, 내 옆에 앉은 고등학생쯤 되어 보이는 남자의 몸도 좌우로 흔들린다. 서울역에서 합류한 두 여자가 서로 마주 보고 웃는다. ‘즐거운 일 있어요? 버스도 나눠 타는데, 좀 같이 웃으시죠.’라고 말하는 상상을 했다. 버스가 급히 속도를 줄인다. 천장에 달린 손잡이가 삐걱대면서 웃는다. 창밖으로 소나무가 보인다. 아까부터 멈추어 서서 손을 흔들고 있다. 이번 정류장은 명동, 영플라자 앞입니다. 우리 모두 내릴 시간이에요. 일어서다가 손잡이에 머리가 닿았다.

렌즈와 고양이

A.
첫 번째 차는 빨간색이래. 멋모를 때 아니면 언제 타보겠어? 안 그래도 동글한데 사과 같겠다. 뭐, 어때. 귀엽잖아. 하긴, 나 컴퓨터 본체도 빨강이다. 너 학교 다닐 때도 그랬어. 모니터 빨간 거 산다고 동네방네 뒤지고.

B.
고양이가 달력을 본다. 고양이가 몸을 돌리다가 달력을 넘어뜨린다. 렌즈가 고양이를 본다. 달력은 누워서 하늘을 본다. 렌즈가 달력과 고양이를 두고 고민한다. 고양이가 달력을 본다. 고양이가 발을 떼자 달력이 나지막이 일어난다. 렌즈가 달력을 본다.

C.
“크림을 냉동고에 넣으면 얼겠지? 그럼 아이스크림이 되는 거야. 그런데 그 크림이 얼면서 노랗게 변했어. 그럼 바나나 맛인가 싶겠지? 이제 그 크림을 부숴서 텀블러에 담아봐. 사람들은 이걸 뭐라고 부를까?”
“바나나 샤베트요.”
“응, 됐다. 합격이야.”

밤 소풍

“야, 화장은 무슨.”
“그래도 그렇지.”
“넌 세수하고 난 다음이 제일 예뻐.”
“웃겨. 그럼 나 모자 쓰고 간다?”
“대충 나와. 팔 아프다.”
“얼마나 산 거야, 또.”
“널 위한 내 마음 아니겠니.”
“반포, 맞지?”
“응. 근데 돗자리가 없는데,”
“그때 그 편의점 있잖아. 왜, 의자 있고.”
“아, 맞다. 거기 있을게, 그럼.”
“버스 없는 거 아니겠지?”
“너희 집 앞에서는 웬만하면 다 갈걸.”
“그런가. 나 못 찾으면 데리러 오는 거다.”
“한강공원 무시하지 마라, 너.”
“치. 말 돌리기는.”
“간판 잘 보고, 방송 잘 듣고.”
“알았거든요.”

브라우니

브라우니, 달다. 거의 모든 카페에서 볼 수 있다. 주 고객층은 20대 여성이지만 가끔 남자들이 사기도 한다. 아마 선물이거나 단 걸 좋아하는 사람이겠지. 이름의 유래는 모른다. 작년 가을부터 진열대에 두지 않았는데 가끔 물어오는 손님이 있다. 카페를 시작할 때부터 팔고 있었지만 유독 선택되는 일이 드물었던 탓이다. 이 매장에 남자 손님이 많기는 하다. 그래서일까, 방향제를 아무리 뿌려도 산뜻한 향이 나지 않는다.

졸음을 쫓기 위해 허리를 펴고 있었다. 하나를 제외한 모든 테이블에 사람이 있으니 꽤 성공적인 오후 같지만, 테이블은 다섯 개뿐이다. 작고 아담한 공간이다. 1번 테이블에 앉은 사람은 매주 수요일 저녁마다 온다. 잠깐 앉아서 휴대폰만 보다가 가는데 오늘은 웬일인지 일찍 도착했다. 3번 테이블의 커플은 아까부터 서로를 노려본다. 일 분에 한마디쯤 하는 것 같다. 4번 테이블은 누군가 5번과 붙여 놓았는데 단체 모임이라도 하는 모양이다. 이런 경우 마감 시간인 9시까지 일어나지 않을 확률이 높다. 2번 테이블은 비어 있고 나머지는 그냥 의자다. 잠깐 앉았다 가는 손님을 위해 두었는데 동네 주민이 와서 쉬기도 한다. 지금도 한 명이 앉아 있다.

어디선가 김치찌개 향이 난다. 누군가 밥으로 먹었나 보다. 다시 방향제를 뿌리지만 역시 향은 나지 않는다. 보라, 모든 테이블이 남자로 가득하다! 3번 테이블의 커플은 여전히 말이 없어서 존재감이 너무 약하다. 환기를 위해 창문을 열어야겠다. 지난주부터 브라우니를 다시 놓아야 하나 고민하고 있다. 어디에나 있는 거라면 여기에도 있어야, 그래야 손님도 안정을 찾지 않을까 잠시 생각했다. 마감 시간이 다가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