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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상 지금처럼만

천장이 열리면서 빛이 쏟아진다. 오늘은 물빛이 하늘만큼이나 파랗다.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환호를 지르기 시작한다. 내가 가장 사랑하는 장소, 우리가 제일 아끼는 순간이다. 이때만큼은 정말 아무 생각도 나지 않는다. 추억을 이어가기 위해 우리는 팝콘을 나누어 먹는다. 언제였는지는 몰라도 우리는 원래 팝콘 없이 단 10분도 앉아있을 수 없는 아이들이었다.

처음 이곳에 왔을 때 우리 중 누군가가 물 색깔이 청바지를 닮았다고 했다. 그 말을 듣고 멋있다고 생각한 우리는 한동안 청바지만 입고 다녔고, 당연한 이야기지만, 청바지는 각자의 옷장에도 점점 쌓여 갔다. 언젠가부터 연례행사가 된 이 공연은 우리가 한자리에 모이는 유일한 시간이 되었다. 돌고래 한 마리가 잠시 하늘을 나는가 싶더니 곧 여러 마리가 줄지어 날아오른다. 나는 고개를 돌려 기억 속 웃음을 하나씩 꺼내어 본다. 우리는 어쩜, 마주 보는 시간도 비슷하다. 유난히 파란 물빛을 보며 우리의 우정도 언제나 파랗길, 항상 지금처럼 설레기를 기도한다.

그럴싸한 시간

한동안 평일 점심으로 아몬드를 먹은 적이 있다. 여러 견과류가 담긴 통을 사다가 조금씩 덜어 먹은 게 시작이었는데, 몇 달이 지나고 보니 아몬드를 먹을 때의 느낌이 가장 좋았기 때문이다. 입안에 담기는 고소한 향이 마음에 들었다. 아몬드에서 자연 특유의 냄새가 난다는 생각도 했는데 풀이 뭉뚝하고 단단할 수 있다면 이런 느낌인가 싶기도 했다. 한때 견과를 밥처럼 먹었지, 라고 생각하다가 오래전 산에 올랐던 기억이 났다. 아직 머리에 남아있는 단단한 풀 때문인가 싶다.

3년 전 어느 겨울엔가, 산을 다녀봐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산은 바라볼 때만 좋아서 여행도 바닷가로만 다녔는데 그때는 조금 다른 걸 해보고 싶었던 것 같다. 나는 산을 오르기 위한 준비로 아울렛을 찾았고, 두 번의 주말을 보내는 동안 배낭과 재킷, 티셔츠, 바지, 등산화 같은 것들을 사들였다. 인터넷으로도 이런저런 물건을 주문했는데 그중에는 아이젠도 있었다. 언젠가 눈 덮인 한라산을 오르겠다는 다짐 때문이었다. 그리고 어느 날 배낭과 물품을 정리하다가 ‘이 정도면 되었다’는 생각을 했고, 다음 주말이 왔을 때 나는 드디어 산에 오르게 되었다. 늦은 겨울, 서울 남쪽에서 두 번째로 높다는 청계산이었다.

가끔 옷장 서랍에서 투명 비닐에 싸인 손수건을 본다. 포장 그대로 남아있는 그 수건은 오래전 산에 갈 준비를 한다며 샀던 많은 물건 중 하나다. 마음에 드는 무늬를 찾겠다고 꽤 오랜 시간 돌아다닌 것으로 기억한다. 아직 겨울이지만 곧 여름이 오면 땀이 많이 날 테니까, 그래서 준비해둔 것인데 그해 여름, 나는 산을 오르기는커녕 그 근처에도 가지 않았다. 그렇게 청계산은 지금까지 내 의지로 오른 처음이자 마지막 산이 되었다. 가끔 산을 좋아한다는 사람을 보면 ‘저도 청계산 가본 적 있어요.’라고 말하면서 그의 경험을 묻고 탐하고, 조용히 공감하기도 한다. 지금처럼 봄이 한창일 때 한라산을 오르면 걷는 내내 유채꽃도 보고 좋을 텐데, 아이젠 없이도 신기하고 재미있을 텐데, 라는 생각을 잠시 했다.

한라산에 유채꽃이 얼마나 있는지는 사실 잘 모른다. 하지만 제주에 널리 퍼진 유채꽃만큼 내 주변 많은 사람이 행복했으면 좋겠다. 재미있는 이야기와 좋은 경험을 나누어준 친구들에게 고마움을 전한다. 내일도 모레도 맑은 웃음이 함께 하기를, 가끔은 그 한구석에 나에 대한 기억도 자리하기를 희망한다.

그림자

눈을 감는다. 나는 어둠 속에서 눈을 뜬다. 그림자를 감춘다. 나는 네 옆에 있다. 너의 향에 대한 기억을 그리고 있다. 나는 네 향을 훔친 빈자리에 내 이름을 쓴다. 네 그림자가 외로워 겉옷을 덮는다. 그리고 다시 이름을 쓴다. 나는 네가 사는 곳을, 나이를 지운다. 네 그림자는 나를 잊는다. 나는 너의 향을 입고 그림자를 밟고, 나를 지운다. 이제 너는 향으로만 남았다. 너는 향으로 남아 세상을 여행하고 나는 그림자로 남는다. 그리고 나는 기억을 잃는다. 어떤 그림자에서는 좋은 냄새가 난다.

그림자는 세상 어디엔가 숨어 있다가 한 번씩 모습을 드러낸다. 그리고 생각한다. ‘나는 최선을 다했어. 나는 오늘도 최선을 다했어.’ 듣지 않아도 어떤 가락인지 아는 음악, 누워서도 할 수 있는 많은 것, 문밖의 뻔한 세상을 떠올린다. 그리고 사람은, 듣지 않아도 어떤 가락인지 아는 음악을 챙겨 들으며 누워서도 할 수 있는 생각을 일어나서 하고 문밖에 뭐가 있는지 뻔히 알지만, 둘러봐야 할 이유를 생각한다. 비슷한 결과를 얻을 게 뻔한 일을 다시 하면서 같은 생각을 하고 같은 리듬을 타는 이유를 오늘은 찾아보자 다짐한다.

그림자가 사람에게 묻는다. ‘그럼 향이 널 죽이는 거니?’ 사람은 향을 떠올린다. ‘아니. 향은 언제나 승리한다. 생각보다 힘이 세서 나를 삼킨다. 하지만 그게 날 죽이는 건 아니다.’ 그림자는 마지막 남은 향을 지운다. 사람은 내일에 대해 생각한다.

604호

몸이 무거워요. 그리고 물소리가 들려요. 원래 이렇게 깜깜한 거예요? 방금 누가 불을 켰어요. 이제 의자가 보여요. 중앙에, 방이 되게 큰데 바닥에 카펫도 있고 책장인가 선반 같은 것도 있어요. 그리고 방이 움직여요. 천천히 제자리에서 도는 것 같아요. 아까부터 누가 문을 두드리는데 소리가 커졌다가 작아졌다 해요. 창문이 없어서 누구인지는 모르겠어요. 문밖에서 무슨 소리도 들려요. 티브이 같기도 하고, 누가 싸우나 봐요.

저는 누워 있어요. 카펫이 오래됐는지 까슬까슬해요. 음악 틀어도 돼요? 바깥에서 나는 소리 듣기 싫어요. 저 요즘 무서운 음악 듣거든요. 막 소리 지르고 그런 거요. 저 별것 다 들어요. 그런데 스피커가 없어요. 방에, 오디오는 있는데 누가 스피커를 없앴어요. 음악은 틀어져요. 누가 진짜 싸우나 봐요. 방금 뭐 던지는 소리도 났어요. 머리가 아파요. 물소리도 계속 나고, 조금 추워진 것 같아요. 저 뛰어도 돼요? 신발 좀 벗고요. 아, 저 묶여있어요. 누가 다리를 묶어놨어요. 잠깐만요, 풀어 볼게요. 운동화 끈 같은데 장난처럼 대강 해놨어요.

이제 됐어요. 그런데 누가 오나 봐요. 발소리가 들려요. 가깝진 않고 멀리서 뛰어오는 것 같아요. 그리고 음악 소리도 들려요. 아까 싸우던 사람들이 틀었나 봐요. 클래식요. 아니, 섞여 있어요. 전자음악 같기도 하고요. 저 배고파요. 우리 고기 먹으러 가요. 의자요? 없어졌어요. 누가 가져간 것 같아요. 저는 아직 누워 있어요. 그리고 카펫이 자랐어요. 풀 같은 게 계속 올라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