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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라우마

기억이 어렴풋하다. 이유가 있어서 하는 일은 아니다. 시간이 많이 흘렀다. 목표만 있으면 된다. 주문을 잊었다. 할 수 있다. 하나부터 다시 센다. 기억을 잊었다. 두리번대긴 싫으니 가던 길을 간다. 시간이 흐른다. 아무도 만나지 않았다. 할 수 있다. 사진이 변했다. 이제 바람이 불지 않는다. 나는 과거가 없다. 이유가 없어도 할 수 있다. 주문을 잊어도 괜찮다. 내일 일을 당겨서 한다. 나는 과거가 없다.

바람

날개가 부지런히 돈다. 역시 더위엔 선풍기다. 복사기를 열고 종이를 서너 장 꺼내 마루에 펼친다. 아, 종이가 날린다. 올려놓을 게 없나 찾다가 빈 컵이 보인다. 갑자기 목이 마르다. 냉장고를 여니 숨이 트인다. 에어컨이 따로 없다. 물을 꺼내다가 찌그러진 맥주캔을 본다. 누가 왜 넣었지. 추리를 하고 싶으나 혼자 사는 집의 범인은 뻔하다. 컵에 물을 따르다가 좋은 생각이 난다. 종이를 찾아 대강 그려두고 다시 물을 따른다. 선풍기 소리가 요란해진다. 지난주부터 새로 사려 했지만 집을 나서면 잊는다. 종이가 날린다. 물컵을 내려두고 냉장고 문을 연다. 밖으로 나가야겠다. 막 세 시가 지났으니 기온이 내려갈 때다. 적당히 걸으면 한 바퀴, 서두르면 두 바퀴는 걷겠다. 오늘따라 동네가 조용하다. 종이를 구겨다가 호주머니에 넣는다. 언젠가 시험공부 중 문제지를 구겨 입에 넣고 씹은 기억이 난다. 생각을 놓으려면 걸어야 한다.

아침

유난스러운 아침이다. 평소와 같은 때에 일어나 씻고 머리를 말리면서 아이폰을 본다. 오늘도 밤새 온 메시지가 많다. 검은 청바지를 입고 의자에 걸린 티셔츠 중 무얼 입을까 고민한다. 로션을 거의 다 쓴 것 같다. 오늘은 잊지 말고 사야겠다. 손을 씻다가 물이 튀었지만 그냥 둔다. 곧 마를 것이다. 어제 입었던 외투를 걸치고 집을 나선다. 차에 올라 시동을 거니 괴성이 들린다. 아직 겨울이구나. 어제보다 회사에 일찍 도착한다. 이십여 년 간 아침을 좋아한 적이 없는데 요즘은 가끔 괜찮다. 차 없는 도로를 달리고 사람 없는 사무실에서 커피를 마시는 것도 은근한 호사다. 아침을 갖기 시작하니 하루가 조금씩 길어진다. 주말여행 거리도 늘면서 더 먼 곳을 다녀오게 된다. 아직은 특별한 시간이지만 곧 평범한 일상이 되길 바란다. 언젠가 익숙해지면 새로움과 일탈을 위해 늦잠을 자보기로 한다.

딸기

“올 때 딸기.”
“늦을 거 같은데.”
“많이 늦어?”
“회식한다 그러네.”
“갑자기? 그럼 밥도 먹고 오겠네.”
“아마. 내일 맛있는 거 먹자.”
“내일도 늦을 거잖아.”
“돼봐야 알지. 뭐 하고 있었어?”
“잤어. 그럼 딸기는?”
“아. 내일 사줄게. 아님 그냥 네가,”
“회식은 뭐 먹어?”
“글쎄. 들은 건 없는데.”
“배고프다.”
“점심 안 먹었어?”
“잤다니까.”
“피자 같은 거 시켜줄까?”
“아니. 맛있는 거 먹고 싶다.”
“이따 생각나면 얘기해.”
“말하면, 사주게?”
“배달되는 거면.”
“됐어. 잘래.”
“화난 거 아니지?”
“아니야. 일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