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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소공포증으로 하나 되기

1.
“저 고소공포증 심한 거 아세요? 육교도 못 건너거든요. 오래전 언젠가 야구장에 갔는데 친구가 앞자리를 예매했어요. 반대편 쪽이라 빈자리가 많아서 높은 곳으로 갈까 하는 걸 제가 반대했죠. 그렇게 야구장에 앉아 한참 경기를 보는데 화장실이 가고 싶어졌어요. 그래서 길을 찾다가 보니 낮은 곳에서 밖으로 나갈 수 있는 통로는 박스 석에 가려서 못 가게 돼 있더라고요. 저는 어쩔 수 없이 높은 곳에 있는 통로로 나갔어요. 그런데 올라갈 때는 어떻게 나간 것 같은데 나중에 자리로 돌아가려고 보니 계단이 너무 가파르고 무서운 거예요. 그 야구장이 유독 그랬는지는 모르겠어요. 아무튼 그래서 못 내려가고 있었는데, 다행히 친구가 저를 발견해서 등으로 가려준 덕분에 겨우 내려갔어요. 친구 등에 딱 붙어서요. 그때 제가 거의 울 것처럼 보였대요.”
“저도 고소공포증이 너무 심합니다. 저번에 단양에 갔을 때 스카이워크인가 하는 게 있었는데, 같이 간 동생이 유리 바닥 쪽으로 쓱 밀어서 진짜 화낸 적 있어요.”
“그런 거 저는 쳐다도 안 봐요. 근처도 안 가고.”

2.
“오래전 회사 언니 중에 아파트 15층에 살던 분이 있었는데, 높은 곳 무서워서 베란다는 쳐다도 안 본다고 했어요.”
“저도 베란다 근처에 못 가요.”
“○○님도요?”
“네. 계단도 조금 높으면 무서워서 잘 못 올라가겠더라고요. 건물 무너질까 봐.”
“계단은 조금 무서워요. 막 상상하게 되죠.”
“운전하다가도 높은 다리 지나가면 무너질까 봐 무섭고.”
“진짜 무서워하시는구나.”
“에스컬레이터도 바깥쪽에 못 서 있고요.”

3.
“롤러코스터는 그래도 꾹 참으면 탈 수 있어요. 금방 끝나니까. 그런데 진짜 무서운 건 공중자전거예요.”
“왜요?”
“계속 있잖아요, 높은 곳에. 안전장치도 없고. 저 그거 타고 펑펑 울었는데, 직원이 저 놀린다고 한 번 더 밀어서 옆에 있던 초딩이 욕했어요.”
“와 직원 나쁘다.”
“공중자전거는 절대 못 타요. 죽인다고 해도 못 타요. 롤러코스터가 차라리 나아요.”
“요즘은 놀이기구 중에 부메랑도 있더라고요. 앞으로 롤러코스터 한 번, 뒤로 한 번.”

4.
“그래도 번지점프는 한 번쯤 해보고 싶은데. 죽기 전에.”
“돈 주고 그런 짓을 왜 해요?”

나는 누구입니까

며칠 전 어느 골목을 지나다가 바닥에 놓인 수첩을 봤다. 누군가 떨어뜨리고 간 모양이었다. 혹시 찾는 사람이 있지 않을까 싶어 둘러보았지만, 근처에는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들뿐이었다. 어딘가 단서가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수첩 첫 장을 열어 봤다. 그러나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았다. 두 번째, 세 번째, 다른 장도 마찬가지였다. 수첩을 빠르게 넘겨 봤지만, 내용이 적힌 부분은 보이지 않았다. 수첩은 사용한 적이 없는 것 같았다. 그런데 마지막 장에 이니셜로 보이는 문구가 남아 있었다. 사람 이름인지는 몰라도 이게 주인을 찾는 단서가 될 것 같았다. 그래서 가까운 파출소를 찾아가 경찰관에게 수첩을 보여줬다. 누군가 떨어뜨린 것 같다고, 주인을 찾아주면 좋겠다고 말하고 그의 손에 수첩을 쥐여줬다. 경찰은 수첩을 앞뒤로 살펴보고 넘겨도 보더니 알겠다고, 맡기고 가시라고 했다. 그래서 나는 고맙다는 인사를 남기고 파출소를 나왔다. 그리고 조금 전 지나온 골목으로 돌아가다가 다시 바닥에 놓인 수첩을 봤다. 아까와 같은 모양인데 겉표지 색이 달랐다. 수첩의 맨 뒤 장에는 아까 본 것과 동일한 이니셜이 남아 있었다. 나는 수첩을 가방에 넣고 서점에 가서 펜을 샀다. 수첩을 잃어버린 주인에게 편지를 써야겠다고 생각했다. 한 시간 뒤에 나는 다시 파출소를 찾았다. 아까 수첩을 맡아주신 경찰관 계신가요, 하고 물었는데 여기에 그런 사람은 없다고 했다. 나는 의아해서 파출소 안에 있는 사람들을 둘러봤지만 정말 아까 본 얼굴은 없는 것 같았다. 나는 다시 파출소를 나와 수첩을 처음 발견했던 골목으로 돌아갔다. 경찰관은 그곳에 있었다. 그는 바닥에 쭈그려 앉아 수첩을 펴고 뭔가를 읽는 듯했다. 가까이 가서 보니 그가 읽던 것은 내가 새로 주운 수첩에 적은 편지였다. 경찰관이 나를 돌아봤다. 나는 순간 그 수첩의 주인이 나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말과 문자

“우울한 이야기는 글자로 치면 기분이 이상해요. 말로 하면 공기 속에서 대충 사라지는 것 같은데 글자로 남기면 뭔가, 어떤 느낌인지 아시죠. 난 그렇게까지 그런 건 아닌데 글자로 치면 되게 그런 것처럼 보이는 그런 것.”
“문자로 적었을 때 더 확실하게 각인되는 느낌이 있어요. 저는 그런 것도 좋아요.”
“글자를 치면 10초 뒤에 사라지는 메신저가 있으면 좋겠어요.
“그러게요.”
“생각해보니 괜찮은데.”
“하지만 문자의 장점이 사라질 수도 있을 것 같아요. 같은 이야기도 말로 하면 공기에 녹아서 없어지다가 돌아오다가 해요. 그런데 적어 놓으면 그 자리에 있어요.
“좋은 이야기는 항상 좋게 남아 있는데 안 좋은 이야기는 오래 고통받을 수도 있고.”
“적어놓고 잠그고 바닷속에 던져 놓아요.”
“둥둥.”
“아, 50킬로짜리 추를 넣을 거예요.”

협소한 관계

“너랑 이야기하면 늘 재미있어.”
“나도 그래. 그리고 이제 확실히 친구를 사귀기 힘든 때가 되었음을 매일 느낀다.”
“친구 콤플렉스로 고민도 많이 했지만, 결국 문제도 답도 내 안에 있다는 걸 깨닫고 있어.”
“그렇구나. 난 그런 고민은 전혀 안 했는데. 여전히 아무도 안 만난다.”
“결혼해서 더 그런 걸까. 그런데 너는 혼자였어도 그냥 조용히 잘 살았을 것 같아.”
“원래 박혀 있는 거 좋아하니까 문제는 안 됐겠지. 결혼한 덕분에 그 협소한 인간관계의 본능적인 것들도 자동으로 해결되긴 했지만.”
“그래. 절친 같기도 하고 연인 같기도 한 그 오묘함.”
“그래도 혼자 있을 시간은 필요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