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대문시장

지난 주말, 버스를 타고 어딘가로 가는 길에 한 노인을 만났다. 옆자리가 비어서 앉았을 뿐인데 ‘기다리고 있었다, 잘 왔다’면서 내 손을 덥석 잡은 노인은 거의 한 시간 동안 쉬지 않고 내게 말을 건넸다. 부모님은 어떻게 지내시느냐부터 이름이 어떻게 되느냐, 학교는 어딜 다녔느냐, 지금 사는 곳은 어디냐, 형제자매가 있느냐, 결혼은 하였느냐, 지금은 어딜 가느냐 등 정말 많은 질문을 받았는데 그러는 동안 나는 네, 아니오, 어디 다닙니다, 어디에 삽니다, 같은 대답을 역시 쉬지 않고 했다. 그래도 나는 질문을 놓치지 않으려고 귀를 기울이다가 잘 들리지 않으면 다시 말씀해주세요, 다시요, 하고 되묻고는 최대한 대답해드리려고 애썼다. 버스가 종로5가를 지날 때쯤 노인은 ‘내려야겠다’면서 벨을 누르고 창밖을 보았는데, 이때 처음으로 노인이 내게서 시선을 거두었다. 버스가 동대문시장에 도착하자 노인은 내 머리를 두어 번 쓰다듬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버스 출입문을 향해 갔다. 노인의 뒷모습을 보는데 문득 나는 질문을 받기만 했을 뿐 노인에게 뭔가 물은 것이 없는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노인의 등 뒤에 대고 조심히 가세요, 하고 말했는데 노인은 버스에서 내리느라 뒤를 돌아보지는 않았지만, 이 말에 잠깐 웃는 것도 같았다. 잠시 후 버스가 다시 출발하자 창밖에 선 노인은 나를 바라보면서 손을 흔들었다. 버스가 시끄러운 탓에 거의 들리지는 않았지만, 노인의 입 모양은 마치 ‘잘 가, 언제 또 놀러 와’ 하고 말하는 듯했다. 그래서 나도 노인을 향해 덩달아 손을 흔들면서 입 모양으로 말했다. 안녕히 계세요, 또 올게요.

주말 고민

“나 올해 계획 중 하나가 주말마다 청소하기였거든. 구석구석 먼지도 털고.”
“청소 안 한 지 오래됐다며.”
“응. 계획이긴 했으나, 귀찮기도 했고.”
“요즘도 집에 잘 안 있지?”
“나 집에 있는 거 싫어하잖아.”
“책은 계속 봐?”
“아니. 두세 달 전부터 책도 재미없어져서,”
“네가 소설 좋아한다고 했던가.”
“그래도 노력은 하는데 잘 안 되네. 응, 난 소설. 책 읽는 속도가 느려지기도 했고.”
“너 사는 게 지루하구나.”
“그런가, 모르겠어. 뭐든 집중할 거리가 있으면 좋겠는데.”
“맞아. 나도 요즘 뭐 재밌는 거 없나 계속 찾아봐.”
“마땅히 생각나는 것도 없고.”
“그러게. 궁금한 것도 없잖아.”
“응. 딱히.”

심리적 친근감

저는 호수 근처에 살아요. 롯데월드 있는 쪽, 서호라고 하던가요? 직선거리로 200미터쯤 되는 것 같아요. 제 방에서 자이로드롭이 보인답니다. 혹시 타보셨나요? 주말마다 롯데월드에 사람들이 많을 거잖아요. 그럼 제 방으로도 기구 타는 소리가 들려와요. 특히 자이로드롭 떨어질 때, 사람들 꺅하는 소리요. 저는 타본 적은 없지만 하도 봤더니 어떤 느낌인지 이미 알 것 같아요. 이 동네 종종 오신다니 왠지 반갑습니다. 마주친 적은 없더라도 괜히 그런 느낌 있잖아요. 친근감이랄까. 저만 그런지 모르겠어요. 수현님 사는 동네도 여기에서 꽤 가까워요. 잠실대교 건너면 바로라서. 가끔 이마트 갈 일 있으면 그 동네로 가거든요. 같은 건물에 롯데시네마가 있던가. 맞죠? 저 거기에서 영화도 종종 봤어요. 그런데 수현님네 동네는 뭐니 뭐니 해도 역시 술, 먹을 것도 많지만 ‘마실 것’도 많은 곳이었어요. 무슨 모임 한다고 하면 거의 ○○에서 보자, 했으니까요. 그럼 우리 다음에는 어디에서 볼까요? 이곳 호숫가에는 뭐가 딱히 있진 않아서 시간을 오래 보내기엔 난감해요. 근처 방이동에는 먹거리가 많으니 거기에서 봐도 좋고요. 혹은 걷는 거 좋아하시면 같이 호수를 한 바퀴 도는 것도 좋아요. 가보고 싶었던 곳 있으면 얘기해주세요.

슬리퍼를 신는 삶

집에서 슬리퍼를 신는 사람의 성격에 관해 생각해봤다. 우선 깔끔하게 정리된 공간을 좋아할 것 같다. 가끔 맨발로 바닥을 디딜 때면 어딘가 정돈되지 못한 기분을 느꼈을지 모른다. 슬리퍼를 신다가 보면 수시로 벗어둘 공간도 필요한 법인데 슬리퍼에 익숙해진 사람이라면 이미 그런 공간도 곳곳에 마련해 두었을 것이다. 현관 앞, 화장실 앞, 침대 옆, 또는 티브이 앞에 앉아서 어딘가 발을 올려둘 때도 항상 슬리퍼는 같은 자리에 놓여 있을 것이다.

집에서 슬리퍼를 신는 사람은 청소를 자주 하기보다 한 번 닦고 정리한 다음에 오래 유지하는 걸 선호할 것이다. 잘 어지르지 않는 차분함을 가졌을지도 모른다. 혹은 게으름, 사람이 게으름을 즐기면서도 그 게으름에 잡아먹히지 않으려면 주기적으로 생활 공간을 정리해둘 필요가 있다고 어디선가 본 기억이 있다. 한 번 정리해두고 건드리지 않는 건 게으른 자만의 능력이라고도 했다. 어쩌면 슬리퍼를 신기 시작한 이유가 단지 몸에 먼지가 묻는 게 싫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바닥에 먼지가 있을지 모르니 발을 깨끗이 보존하기 위해 신었을 거란 이야기다.

집에서 슬리퍼를 신고 지낸다는 것은 관리해야 할 생활용품이 하나 늘어난다는 뜻이다. 매일같이 신어야 하니 금세 더러워질 것이고, 그러면 주기적으로 닦거나 빨아줘야 하는데 언젠가는 신발처럼 해지고 망가질 것이기 때문에 한 번씩은 새로 살 필요도 생긴다. 그런데도 집에서 슬리퍼를 신는다면 그건 분명 자기 삶에 대한 애착이 강한 탓일 것이다. 혹은 부지런함과 게으름 사이에서 균형 잡는 것에 능한 사람일지도 모른다. 깔끔하게 정리된 공간에서 즐기는 게으름은 그 의미가 조금 다른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