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도를 지나가다가 악어를 보았다. 악어는 시멘트 바닥에 누워서 눈을 깜박이고 있었다. 동물의 왕국에서나 볼 수 있던 악어가 눈앞에 있으니 신기하면서도 이상했다. 악어는 몸집이 그리 커 보이지 않았다. 다 자랐을 때의 크기를 몰라서 ‘몸집이 어떻다’고 말하기는 조금 애매하지만, 왠지 성인은 아닌 것 같았다. 나는 악어와 눈을 마주치고 싶었다. 그래서 가까이 다가가서 손도 흔들고 발도 구르면서 관심을 끌었다. 그러나 악어는 허공을 보면서 눈만 깜박일 뿐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때 가까운 곳에서 문이 열리더니 흰 가운을 입은 남자가 나왔다. 남자는 리모컨으로 보이는 작은 기기를 들고 있었다. 나는 순간 그 리모컨으로 악어를 조종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남자가 악어를 향해 천천히 다가왔다. 수인, 남자는 악어를 그렇게 불렀다. 수인, 일어나. 가자. 남자는 리모컨을 이리저리 돌려보더니 버튼을 누르는 듯했다. 수인, 그만 자고 가자. 그때 갑자기 악어가 움직였다. 악어는 천천히 고개를 들더니 나를 바라봤다. 악어의 눈은 이제 깜박이지 않았다. 나는 조금 무서워서 뒤로 몇 걸음 물러났다. 악어는 한참 동안 나를 보더니, 눈을 다시 깜박이면서 남자를 향해 몸을 돌렸다. 그리고는 천천히 움직였다. 악어의 뒷모습을 보니 꼬리가 상당히 짧아 보였다. 남자는 다가오는 악어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그리고 나를 향해서도 손을 흔들었다. 나는 남자의 손이 악어의 이빨을 닮았다고 생각했다. 악어는 남자를 지나 그가 나왔던 곳으로 천천히 미끄러지듯이 들어갔다. 남자가 나에게 다가오더니 내 이름을 물었다. 나는 그 남자도 조금 무서워서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답했다. 정해. 윤정해요. 남자는 웃으면서 내게 악어 좋아하니, 하고 묻더니 보고 싶으면 언제든 오라면서 명함을 건네줬다. 명함에는 아까 본 악어를 꼭 닮은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희준의 렌즈
카메라 렌즈가 깨졌다. 한 해의 마지막 날은 조신하게 보내자고 그렇게 다짐했거늘 또 흥을 이기지 못했다. 술이 문제일까. 아니다. 오늘은 별로 마시지도 않았다. 골뱅이무침에 골뱅이가 얼마 없다고 화를 낸 기억도 난다. 버스가 도착할 때 카드를 꺼내기 위해 가방을 뒤질 때도 몸을 흔들지 않고 똑바로 서 있었던 나다. 그럼 이 가파른 언덕 때문일까. 집에 도착하기까지 세 번은 오르내려야 하는 언덕 때문에 가끔 정신이 멍해지기는 한다. 그래도 힘든 건 오르막이고 내려갈 땐 또 괜찮았는데. 내려갈 때. 내리막에서 조금 폴짝대기는 했다. 그런데 그건 오를 때 숨차고 힘든 것에 대한 보상이었을 뿐이다. 보는 사람도 없는 밤인데 뭐, 그럴 수 있잖은가. 선물로 받은 물건은 망가지고 깨지는 게 내 운명인가 싶지만, 이 렌즈는 왠지 마음이 아프다. 오래 간직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너마저 나를 떠나다니. 눈물이 나올 뻔했다. 몇 걸음만 더 가면 우리 집 대문이고, 그럼 곧 내 방이고, 푹신한 침대도 있고, 그럼 카메라도 쉴 수 있었는데 나는 뭐가 그리 급했을까. 이런 날 종로까지 카메라를 메고 갈 생각을 했다는 게 잘못이었을까. 사진을 마구 남길 것도 아니면서 왜 그랬을까. 렌즈를 선물로 받은 게 문제였을까. 그럼 이 선물을 준 사람은 어떻게 되는 거지. 모르겠다. 사람까지 생각이 미치면 당장 그만둬야 한다. 희준이 준 렌즈, 함께 메던 카메라, 한 정류장 지날 때마다 번갈아 가면서 찍던, 그런 쓸데없는 생각이나 하라고 마지막 날이 있는 건 아닐 텐데. 조신하게 보내지 않으면 분명 또 후회한다고 그렇게 다짐했거늘, 이놈의 흥이 문제다. 술이 문제일까. 아니다. 오늘은 별로 마신 기억도 없으니까. 골뱅이무침에 있는 소면을 혼자 다 먹겠다고 그릇에 덜어가던 기억도 난다. 그런데 이 렌즈는 왜 깨진 걸까. 왜 하필 마지막 날이었을까.
밥을 먹다가
꼬리곰탕은 꼬리로 만든 거겠죠? 아마도요. 목살은 목 부위니까. 저는 ‘꼬리’라는 단어를 보면 다른 동물이 연상돼서 잘 못 먹겠어요. 무슨 동물이요? 그냥, 소 말고 다른 거요. 미진씨는 괜찮아요? 저는 그런 거 없어요. 어쨌든 고기잖아요. 그럼 혹시 뱀 같은 것도 드시는? 뱀은 조금 징그럽지만, 막상 눈 앞에 있으면 먹을 것도 같아요. 제가 워낙 먹성이 좋아서요. 누가 요리해주는 것도 곧잘 드시고 그래요? 맛에 민감하다거나 유독 맛집을 찾아 다니신다거나. 아유, 웬걸요. 제가 가는 곳이 곧 맛집입니다. 아무거나 줘도 다 잘 먹는다는 게 저의 몇 없는 장점 중 하나예요.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 치고는 상당히 날씬해 보입니다. 사람을 외모로 판단하시나요? 그런 건 아니고요. 저는 보시다시피 살이 좀 붙어 있잖아요. 그런데 짐작하시겠지만, 저는 음식을 많이 가립니다. 우선 파를 먹지 않고요, 익힌 당근이라던가 생 오이라던가, 이런 걸 먹으면 속이 거북해져요. 그거 왜인지 아세요? 다 어릴 때 교육 때문이래요. 다들 그 얘기 하더라고요. 그런데 저희 집, 꽤 엄했는데. 밥 먹을 땐 아니었나 보죠.
달덩이
“너는 이상형이 뭐야?”
“재미있는 사람.”
“끝?”
“재미있고 웃긴 사람. 그리고 자기 삶이 있는 사람. 내가 배울 점이 있는 사람도 좋아.”
“자기 삶이 어떤 거지. 외모적으로는?”
“동글동글한 사람.”
“동글동글?”
“응. 얼굴이나 뭐 등등. 근데 사실 외모는 별생각 없어.”
“그런 사람이 왜 좋아?”
“동글동글한 사람은 왠지 마음도 동글동글할 것 같거든.”
“달덩이 같은 사람은?”
“아, 너무 좋아.”
“나는 어떤 것 같아?”
“뭐가?”
“이상형으로서.”
“생각 안 해봤는데. 네 이상형은 뭐야?”
“너.”
“뭐?”
“너라고. 이상형.”
“취했구나.”
“나 안경 낀 사람 좋아하거든.”
“세상 사람 절반이 안경 끼고 다니지 않나.”
“그럼 그냥 너로 하자.”